누군가의 재은, 나의 재은

다음 생엔 마호가니 가구가 될테야


‘아빠는 꿈이 뭐야?’라고 물으면

시집을 내는 것이라 했다.

대답을 듣고보니 시인과 아빠는 퍽 잘 어울린다.

담백하고 한결같은 것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나는 시를 쓰는 방과 후 활동을 하거나 운문대회를 나가고는 했는데

내가 시를 읽고 좋아한 데에는 아빠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산문보다 짧아서 쓰기 더 쉬운 줄 알았던 것이 더 크지만.

운문대회는 꼭 야외에서 열렸다.

큰 돌을 책받침 삼아, 정자에 엎드려서 시를 썼다.

몇 가지 개연성 없는 단어들을 주제어로 주고 그 중 몇 개를 골라 시에 녹여내면 되는 것인데

나는 열 몇번을 나간 대회에서 한 두번쯤 낮은 상을 탔던 것 같다.

상을 타고 못타고 상관없이 어린 나는 그냥 학교를 합법적으로 빠지고 놀러가는게 좋았다.

아빠는 시를 참 쉽게 썼다.

시를 써가는 숙제를 들고 끙끙대고 있으면 대충 중얼중얼 해보더니 ‘이렇게 쓰면 어때?’라고 말했다.

아빠의 표현을 빌려 쓴 날은 어김없이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아빠는 고등학교 때 시를 써서 냈는데, 선생님이 어디서 베껴온 게 틀림없다고 혼내고는 그 시를 출품하지 못하게 했다고 했다.

그 뒤로 아빠는 시를 자주 쓰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얼굴도 모르는 그 선생님을 한동안 미워했다.

아빠는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가끔 자기 전에 이 시를 읊어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자기 직전인 딸에게 읽어주기엔 꽤 잔인한 시가 아닌가 싶다.
그때는 ‘누가 간장게장으로 시를 쓰는 거람? 웃기는 사람이네’ 하고 말았는데.

십몇년이 지난 지금 생각건대, 어쩌면 아빠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중학교 때의 언제쯤 아빠에게서 봄에 관한 시가 문자로 왔었다.
시가 문자로 온 적이 없어서 나는 ‘스팸문자인가?’ 하고 지워버렸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저장해두었을텐데

다시 보내달라고 해도 아빠는 픽하고 삐져서는 다시 보내주지 않았다.
요즘은 통 아빠가 시를 쓰지 않는단 말이야.

내년엔 꼭 아빠랑 시를 주고 받아야지.
그리고 시집을 낼 거야. 몇 권도 팔리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 아빠가 그리워질 때는
아빠의 시를 읽을 거거든.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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