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상상처 (미완1)
매복 사랑니를 뺄 때나 최근 있었던 발목 수술을 받을 때나 나는 항상 같은 이미지를 상상한다. 마음을 무한정 안정시킬 수 있는 나의 한 때. 평화로웠던 독일 생활, 매일같이 들렀던 기숙사 근처 슈퍼마켓을 그린다. 간판은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네모난 모양에 흰 바탕에 빨간 글씨로 꽉꽉 채워 ‘Kaufland’라고 적혀있는 것이 전부이다. 이름도 얼마나 단순하게 지었는지 한국어로 번역하면 쇼핑 지대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단순하고 순수한 마트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과일은 신선했고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초콜릿들이 많았다. 다양한 향신료가 가득찬 구간을 지켜보다가 하나씩 집으로 사오는 것이 행복했다. 배정받은 기숙사 방에 짐을 풀어두고 가장 먼저 먹게 되었던 음식도 이 마트 안에 있는 빵집 모짜렐라 샌드위치였다.
독일 생활을 정리하며 (미완 2)
12월쯤부터는 창문을 열면 눈이 시리게 하얀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외출할 때 착용하는 워커와 털 모자가 익숙해졌다. 자전거 도로를 피해 걷는 것이 몸에 익었다. 내가 있던 도시는 노이 울름이라는 작은 소도시다. 동양인이 몇 없던 작은 도시라 길을 걸어 다니면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들을 받을 수 있었다. 그마저 편해졌을 때 한국으로 돌아갈 시기가 되었다. 나의 독일은 행복했다. 독일에 도착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한국에서 나를 짓누르던 부담과 걱정이 시야에서 걷혔다. 그 후로 내 머리는 그날의 날씨, 계절의 향기, 소소한 거리의 모습 같은 것들로 채워졌다. 매일 따뜻한 차를 내려 마트에서 고심해서 고른 쿠키와 곁들여 마셨다. 따뜻한 차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차의 혼령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아주 지루하고 사랑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하루의 가장 큰 고민은 ‘오늘 뭐 먹지?’였고 고민이 이뿐인 것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독일에서는 몇 년 뒤, 몇 달 뒤가 아닌 몇 시간 뒤 메뉴 걱정만 하면 되었다. 나도 모르게 깊이 숨겨둔 감정이 슬금슬금 나와서는 사소한 것에도 열심히 울고 타인의 감정에도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내 눈시울이 붉어질 때는 마냥 슬픈 감정보다 누군가의 성취와 감동적인 것들을 보고 들었을 때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곳 저곳을 혼자 여행하면서 내가 누군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나는 하루하루 나다워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