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재은, 나의 재은

다음 생엔 마호가니 가구가 될테야


부끄럽지 않은 글

내가 쓴 글을 누가 읽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아도 글이 쉽게 써지지 않는다. 하려던 말이 있었는데 이리저리 적어놓고 보면 어느새 부끄러워진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쓰려고 했던 것 같다. 추측을 할 뿐인데 글로 옮겨 놓으니 괜히 내가 세상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내 글을 자꾸만 지울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어릴적 일기장을 들추어보는 것 같다. 그 때도 그런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쩜 이런 생각을 이렇게 당당하게 했을까 싶다. 나중에 보아도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틈틈히 써뒀던 글 중에는 지우고 싶은 글도 있지만 오랫동안 보관하고 싶은 글도 있다. 18살때 쓴 글이 그렇다. 고등학생때 한 학기동안 기숙사에 들어가 생활한 적이 있었다. 내게는 참 끔찍한 기간이었다. 아침 잠이 많은 나는 엄마가 알아온 기숙형 고등학교를 지원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는 덜컥 붙어버렸지만 기숙사를 가게 된 건 입학한지 1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한 방에 4명씩 들어가 룸메이트들과 함께 잠을 자고 밥을 같이 먹고 같이 씻고 화장실이라도 간다하면 옆 칸엔 항상 누군가가 있었다. ‘같이’를 강요받는 기분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내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 성적이 더 오를 것이라 생각했다. 조금 더 버텨보라고 하거나 내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엄마도 당장 퇴관을 허락하는 것보다 나에게 버티는 힘을 길러주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나를 퇴관시켜주는 대신 하루의 마지막에 글을 써보라고 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글은 하루의 일기보다는 카운트 다운에 가까웠다. 딱 한학기를 버텨보기로 했다. 엄마는 버틴다는 생각은 나를 끌려가게만 만든다고 했지만 여유가 없는 와중에 내 내면의 소리까지 제어할 겨를은 없었다. 아무튼 그 글 중에서 아직도 아끼는 글이 있다. 힘들다거나 빨리 나가고 싶다는 글이 아니라 그때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지금 이 시절을 잊지말아달라고 했다. 자유가 없는 지금을 버티고 있는 중에 미래의 내가 나를 잊어버릴까봐 혹시나 지금 이 순간이 희석되면 괜히 억울할 것 같다고 적혀있다. 정말 그랬다. 18살의 나는 이 순간을 버티는 것이 미래의 내가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든 말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그 글을 읽을 때마다 과거의 내가 안쓰러우면서 자꾸 마음에 걸린다. 과거의 나는 성공한 것이다. 대학교 졸업을 앞둔 지금까지 나는 그때의 나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나의 순간은 어느 한 때로 나눠지지 않지만 그 글을 썼던 시기의 나는 나에게 아픈 손가락같은 기억이 되었다.나는 솔직했던 내가 사랑스럽다. 그 글은 이상하리만치 부끄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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